좋은여행지
살다 보면
가끔 집에서 멀리 떠나는 기회가 생기게 마련이다.
나는 습관처럼 매년 8월 첫 주말이면 가는 곳이 있다.
그냥 간다기 보다 되돌아 간다고 해야 맞으리라.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니까. 5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그 코흘리개 친구들이 보고싶고 고향이 그리워서다.
내가 자란 고향 마을, 초등학교를 오가던 언저리, 그리고 그 초등학교 교정,
그것 뿐이 아니다 늘 나처럼 반갑게 조건없이 달려오는 초등학교 동창들.
친구들이 준비한 고향스런 횟감 등등이 나를 반겨주기에 기분이 좋다.
금년은 자료도 수집할 겸해서 하향길에 마음 속으로
부석사와 청량사에는 다녀와야지 하면서도 짖궂은 날씨 때문에 다소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날씨와 무관하게 행동으로 옮긴 결과 영주 부석사도 찍고,
봉화 청량사 입구 낙동강 줄기 다리에 닿았을 때만 해도 빗줄기가 장대같아서
차 안에서 망설이다가 언제 여기까지 또 오려나 싶어서 오기가 생겨 산을 올랐더니
차츰 산자락의 안개가 흩어지고 날이 맑아져 청량사도 찍을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영주 부석사 모습들이다.
부석사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이곳에 닿으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IC로 빠져나가서 도산서원, 선비촌을 지나
봉화방향으로 부석사 이정표를 따라 가다 보면 닿게 된다.
주차장에서 차를 두고 음식점 골목을 지나 비포장 비탈길로 오르면 절 입구가 나온다.
한여름 날씨라 무더위가 30도를 훨씬 윗도는데다 아침 나절의 고온다습 기온으로 땀이 비오듯 했다.
일주문 저 안쪽에서 내려오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아침 이슬처럼 싱그럽다.
방학기간이라 자료수집차 방문한 초등학생들은 더위도 잊은 채 어깨동무까지 하며 신이 나게 지나쳤다
사찰을 향해 오르다 보면 좌측에 당간지주가 깔끔하다 .이 절의 당간지주(보물제255호)는 사찰이
들어설 즈음에 세운 것일 터인데 원형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 앞에 설치했던 건축물로서 그 주변지역이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돌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철·금동·나무로도 만든단다. 2개의 기둥을 60~100㎝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마주보는
안쪽 면에 간(杆)을 설치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두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기단부를 설치했다.
나는 나리꽃에 대한 추억이 많다. 농촌마을엔 집집마다 큰 소가 한 마리씩 있었는데 농가의 큰
일꾼이었다. 이른 봄부터 밭갈이, 논갈이로 해가 저물 때까지 부려먹는 게 소였다.
그러했던 시절에 소를 기르는 몫은 아이들 몫이었다. 물론 칡넝쿨이나 먼 계곡 산자락에 있는
천수답 논뙈기 부근에서 풀을 베는 일은 어른들 몫이기도 했지만...
그 소 꼴을 베던 유년시절에 흔히 봐 온 들꽃이 저 나리꽃이 아닌가.
그냥 스칠 수 없어 카메라에 담았다. 천왕문에 닿으려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문을 통과하는 좌우측엔 사천왕이 사시사철 악귀의 접근을 막느라
눈을 부릅 뜬 것도 부족해 폭약이 든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위 사진의 맞은 편 사천왕은 칼도 들고 서 있었다.
후레쉬를 터트려 사진을 찍었더니 눈동자를 치켜뜬다. 더 험상궂게...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 해동(海東) 화엄종의 종조(宗祖)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고려 공민왕 7년(서기 1358년)에 홍건적의 침략으로 화재를
당해 우왕 2년(서기1376년) 무량수전이 재건된바 있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 부석사는 불교 경전의 하나인 화엄경(華嚴經=석가가 도를 이룬 후 맨 처음 설법을 한 가르침을 담은
경전, 만덕(萬德)을 쌓아 장엄하게 하는 것. 즉 덕을 쌓는 도를 수양하는 절이다.
*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은 안동시 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 제자
능인대사가 창건한 절>은 무량수전보다 4년 앞선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
무량수전 마당. 부석사에서의 무량수전은 다른 큰 절의 대웅전 격이다.
무량수전 정면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석등, 국보 제 17호다. 모양은 웅장하지 않지만 문양이 정교하다.
무량수전 기둥 옆 문살을 걸때 사용하는 쇠막대기에서 잠자리도 법문을 듣는지 요지부동이다.
무량수전을 바라볼 때 좌측에 부석(浮石)이 보인다. 한자로 뜰 부, 돌 석이니까 돌이 떴다는 것인데,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저 아래의 바위와 윗쪽 바위가 서로 붙지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진짜 돌이 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냥 보기에도 약간 떠 있는 듯한 간격이다. 절간 중간중간에 상사화가 피어 고왔다
무량수전 풍경(風磬)이 고요하다.
3층 석탑
절간에서의 물고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수중중생의 해탈을 위하여 두드린다는 나무로 만든 고기 즉, 목어(木魚).
물고기는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밤낮으로 설파한다는 의미에서 나무로 빚어서 달아놓는다.
스님들이 염불을 외면서 손에 쥐고 있는 목탁에도 양쪽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것이 바로 물고기의 눈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 부석사내 문화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4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제255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등이다.
절간을 오가는 군데 군데에 원추리가 피어 고왔다.
8월초에 찾아간 부석사에는 고요한 산사와 아름답게 피어 고운 상사화, 목백일홍, 접시꽃, 원추리꽃,
그리고 봉선화, 참나리꽃 등등이 어우러져있었다. 그날따라 간밤에 내린 호우 때문이었던지 산새도
그 많던 매미도 우짖지 않은 고요였다. 그야말로 절간 같은 분위기였고. 산자락마다 풍성한 녹음의
무더위를 쏟아내는 통에 산사를 찾아 오를 땐 계하(季夏=끝여름)의 마지막 발악인양 찜통이었건만,
하산길엔 나무가지끝을 흔드는 싱그러운 한 줄기 바람이 내 가슴속을 가로질러 감은 왜 일까.
글&사진/동천 이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