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타는 고려산’은 놓치고 말았다.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축제 기간이 지난달 27일까지였는데, 25일 찾았지만 이미 진달래 꽃이 퇴색하고 새잎이 돋고 있었다. 올봄 날씨가 일찍 더웠던 데다 간간이 비가 내리면서 꽃잎이 일찍 져버려 축제기간을 20일까지로 단축했다고 한다.
인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송해면 등 4개 읍·면의 경계에 놓인 고려산(436m)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4월 중순 이후에 20여 만평의 능선과 비탈에 연분홍 꽃바다를 이루는 진달래 군락이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 군락은 고려산 정상에서 능선 북사면을 따라 355봉까지 약 1㎞에 걸쳐 펼쳐진다. “꽃에 갇혀 숨이 멎을 듯하다”는데 그걸 못보고 말았다. 이날 찾아온 등산객들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고려산 산행은 강화도 전경뿐 아니라 한강, 임진강, 예성강, 송악산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통팔달 전망, 힘들지 않은 4㎞ 정도의 아름다운 능선길, 무엇보다 강화팔경의 하나인 낙조대가 있어 흐드러진 진달래 군락을 보지 못했더라도 아쉽진 않다.
#2
강화도만큼 서울 근교에 있으면서 역사유적과 함께 바다, 산, 갯벌 등을 고루 볼 수 있는 관광지도 없다. 고조선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유적과 유물들이 널려 있어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화도는 역사의 상처를 안고 있는 지역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의 근거지였고, 조선시대에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화도 특히 고려산의 연원은 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며 또한 창연하다.
강화도에는 마니산이 있어 영험하고, 고려산이 있어 기개가 높아 출중한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는데, 그 중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바로 이곳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강화도의 향토 지지(地誌)인 강도지(江都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하점면 부근리 고려산 기슭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강화도 향토 유적 26호로 지정되어 있는 하점면 지석묘 앞의 고인돌 공원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지’가 세워져 있다.
고려산의 옛 명칭은 오련산(五蓮山)이었다고 한다. 적석사 대웅전 상량문의 기록에 보면, 416년(고구려 장수왕 4)에 중국 동진의 천축조사가 이 산에 올라 다섯 색상의 연꽃이 피어 있는 ‘오련지(五蓮池)’를 발견했는데, 이 연꽃들을 하늘에 날려 이들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적석사)와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 등 다섯개 사찰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천축조사는 천축국의 스님 또는 인도의 고승으로 ‘버전’이 달라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은 적·백·청련사 세 사찰이 남아 있으니 참으로 오묘한 전설이다.
고려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때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고려산이라 부르게 됐다는 게 맞는 듯하다. 고려의 도읍이던 송도에도 고려산이 있는데 거기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에 강화도호부의 진산(鎭山)을 고려산으로 기록한 것을 보아도 고려 때 지어진 이름일 것이다.
#3
요즘 전국 곳곳을 누비며 지맥(支脈)산행을 즐기는 산악인들 사이에는 ‘강화지맥’을 타는 이들도 있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강화지맥을 보면, 강화도 동북단인 양사면 철산리 해안에서 출발해 별악봉, 성덕산, 봉천산, 시루메산을 지나 고려산, 혈구산, 퇴모산, 덕정산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산줄기가 나뉘어 정족산, 길상산으로 향하거나 남서쪽 진강산, 마니산으로 이어진다.
고려산 산행은 적석사 코스가 가장 선호되며 그 다음으로 백련사 코스, 청련사 코스가 흔히 이용된다. 기자는 승용차로 적석사 코스를 찾았으나 미처 표지를 발견하지 못해 고려산을 한바퀴 돌아 백련사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416년(장수왕 4)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백련사는 창건 뒤의 역사는 뚜렷하지 않다. 1806년(순조 6)에 세운 사리비와 부도가 가장 오랜 유적이다. 큰 사찰은 아니지만 300년 이상된 은행나무 등 고목들이 사찰의 역사를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진달래 군락만 보려 한다면 백련사 코스가 가장 가깝다. 20분 정도 오르면 도로가 나오는데, 고려산 정상의 군부대가 이용하는 도로다. 도로를 다시 10여분 오르면 군부대 아래에 도착한다. 바로 정상에서 북사면 방향으로 진달래 군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는 혈구산과 석모도 진강산, 웅장해보이는 별립산, 석모도 행명산 등 강화도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낙조봉까지 4㎞ 정도의 능선길이 이어진다. 이제 막 자리잡고 있는 신록(新綠)은 꽃 못지않다. 이 능선길은 부드러운 흙길인데다 울창한 나무들, 중간중간 고인돌군이 나타나 고려산을 찾는다면 꼭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능선의 끝부분에 낙조봉이 자리한다. 낙조봉 부근은 가을이면 억새가 또한 일품이다. 낙조봉에서 오던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면 미꾸지고개로 떨어지고, 왼쪽으로 틀어 가파르게 내려가는 좁은 등산로로 5분 정도 가면 적석사 낙조대를 만난다. 낙조대에는 관음상이 서 있고 그 관음상 방향으로 펼쳐지는 서해의 낙조가 강화팔경의 하나다. 현재 관음상을 헐고 공사를 하고 있다.
적석사의 대웅전 상량문에 “고구려 장수왕 4년 천축조사가 고려산 정상 오련지에 임하시어 다섯송이의 연화를 공중에 날리시고 그 중 적련(赤蓮)이 떨어진 낙조봉 아래 터를 잡아 적련사를 창건하시니 오늘날 적석사의 옛이름이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혈구산으로 이어지는 종주를 즐기는 등산객들도 많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코스▲ 백련사 입구 ~ 백련사 ~ 오련지 ~ 고려산 정상 ~ 고인돌군 ~ 낙조봉 ~ 낙조대 ~ 적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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